내 삶의 20초
신장식
(MBC 라디오 '신장식의 뉴스 하이킥' 진행자, 관악뿌리재단 회원)
2022년 8월 8일부터 9일까지 서울에는 역대 시간 당 강우량 최고치를 기록하는 폭우가 내렸습니다. 집중 호우가 시작되던 8월 8일 오전 10시 경, 버스 운전사 곽정규 씨는 여느 때처럼 6716번 버스를 운행해서 양화대교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정규 씨가 양화대교 중간쯤을 건너가던 중, 앞쪽으로 20대 여성이 다리 난간을 잡고 허리를 꺾어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많은 차량이 양화대교를 건너고 있었지만, 그 여성을 보지 못했는지 모두 지나쳐 갔습니다. 정규 씨도 무심코 지나칠뻔했습니다. 그런데 얼핏 눈에 들어온 그 여성의 발치에는 신발과 가방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정규씨는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했습니다.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급히 버스를 멈춰 세운 뒤 정규 씨는 황급하게 버스 문을 열고 뛰쳐나갔습니다. 정규 씨는 차도와 인도를 분리해 놓은 낮은 난간을 뛰어넘어 달려가서 다리 난간 위로 올라서는 여성을 끌어 내렸습니다. 정규 씨가 여성을 발견하고 구조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0초.
"그날따라 날씨도 안 좋은데 물살도 셌습니다. 위험하니까 경적을 두 번 울렸는데 이쯤에서 한 발 더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이거 너무 위험하다 싶어서’ 바로 차를 세웠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순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규 씨는 여성을 난간에서 내려오게 한 뒤에도 혹시라도 여성이 위험한 행동을 할까 걱정돼서 그 여성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승객 한 분이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습니다. 정규 씨는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여성을 위로하며 어깨를 계속 토닥여줬습니다. 여성을 경찰에 인계한 정규 씨는 다시 6716번 버스를 몰고 양화대교를 건넜습니다. 여성은 인근 지구대에서 가족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양화대교 난간에 올라선 그 여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혹시 그 여성에게 다시 까마득한 양화대교 난간 위로 올라가려는 마음이 다시 생긴다면, 마지막까지 당신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어깨를 토닥여 주던 정규 씨의 마음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둘러 경찰에게 전화를 했던 여자 승객의 마음도 떠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날 시내버스 안에서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했을 승객들의 바람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까마득한 난간 위에 올라선 사람을 발견한다면, 이유를 묻지 않고 내 삶의 20초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깃들기를.
뿌리재단 가족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