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송경용
(관악뿌리재단 고문,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19세기 영국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라는 책을 썼습니다. 19세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입니다. 농업과 농노가 생산력의 기반이던 중세 봉건체제가 끝나고 생산력은 물론이고, 사람과 물건의 유통능력이 수백, 수천 배로 향상됩니다. 공장이 들어서고, 노동자가 탄생합니다.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자원으로 부를 축적합니다. 농노에서 노동자가 된 사람들이나 공업과 상업, 무역을 주름잡던 자본가들도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주나 교회 권력에 예속되어있던 농노들은 기업가, 자본가에게 예속됩니다.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사람이 기계의 한 부속처럼, 상품처럼 취급됩니다. 착취를 통해 소외와 배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이런 시기에 존 러스킨은 ‘사람이라는 동력기관은 오직 ’애정‘이라는 연료가 공급될 때, 그 동력인 의지와 정신을 최고의 상태로 고취 시켜 최대의 노동량을 산출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부는 곧 생명이고, 이 부를 얻기 위한 선결조건은 정직과 애정이다’, ‘가장 부유하다는 것은 생명이 풍부하다는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더 많은 물질을 쌓기 위해 가혹한 아동노동, 무자비한 노동조건 하에서 착취와 배제도 불사하는 ‘죽음의 경제(학)’을 버리고 ’생명의 경제(학)‘으로 돌아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존 러스킨이 영감을 받은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포도밭에서 일꾼을 구하자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후가 돼서야 온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임금을 지급할 때 이상한 셈법이 등장합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사람과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한 것입니다. 당연히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항의했겠지요. 억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셈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도밭 주인은 늦게 온 노동자의 사정을 고려합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고, 늦게 온 노동자 자신도 여러 사정이 있어 소위 ’인력시장‘에서 늦게 팔린 것입니다.
존 러스킨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노동자의 임금은 시간 곱하기 생산량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동 그 자체가 존중되어야 하고, 노동자가 충분히 쉴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면서 재충전할 수 있을 만큼이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어야 하고 그것이 기업가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과 노동 그 자체가 부와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임을 존 러스킨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도 ’늦게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출생부터 늦게 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고, 살다 보니 늦어지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관악사회복지‘, ’관악주민연대‘는 처음부터 늦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이웃들과 함께 해왔습니다. 늦더라도 함께 가는 방식을 추구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늦더라도 함께‘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함께 했던 우리들의 정신, 삶의 뿌리였습니다.
그 뿌리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물질보다는 더 많은, 더 풍성한 생명을 쌓고 나누기 위해 설립된 ’관악뿌리재단‘을 응원합니다. 함께 하는 여러분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